조직심리 | 언제부터 내 일이었지? 역할모호성

● 일을 하다 보면 리더가 슬쩍 업무를 얹거나, 이미 직책자들끼리 결정해 놓은 사안을 하소연하듯 풀어놓으며 어쩔 수 없이 맡아주길 바라는 상황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처음에는 내막을 잘 모르기에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무 뜻 없이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돌아선다.
●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면 그 일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내가 맡은 업무가 되어 있다. 기존 업무 위에 얹힌 부담은 커지고, 문제는 그제서야 시작된다. 명확히 “제가 맡겠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업무가 고정되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종종 이렇다.
“그때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나.”
“이미 담당자로 정해진 건데, 지금 와서 이러면 곤란하다.”
● 부탁하던 태도는 사라지고, 책임을 묻는 말만 남는다. 그리고 구성원은 어느새 담당자로서의 죄책감을 떠안게 된다. 이런 일은 개인의 성향 문제가 아니라 조직 구조와 심리의 문제다. 위계 조직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지시를 ‘부탁’의 형태로 전달하는 순간이 자주 발생한다. 이때 요청과 지시의 경계는 흐려지고, 책임의 위치는 불분명해진다.
● 조직심리학에서는 이를 역할 모호성(role ambiguity)의 전형적인 사례로 본다. 역할과 책임이 명확하지 않을수록 업무 스트레스는 커지고 신뢰는 빠르게 무너진다. 더 큰 문제는 이 과정에서 구성원이 “경계를 세우는 행동 = 무책임”으로 해석되기 쉽다는 점이다.
● 이는 명백한 심리적 계약 위반이다. 리더의 역할은 업무를 잘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책임의 최종 지점에 서는 것이다. 병목이 생기거나 업무가 비정상적으로 쏠릴 것이 예상된다면 리더는 재분배와 재배치를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을 미루고 부탁과 암묵적 합의로 넘길수록 조직의 피로는 아래로 쌓인다.
● 구성원이 리더를 신뢰하게 되는 지점은 바로 이런 순간에서 시작된다. 일이 잘될 때가 아니라, 누가 책임을 져야 할지 모호해질 때 앞에 서는 사람, 팀원이 실수하거나 업무적으로 막다른 상황에 놓였을 때 뒤로 숨지 않고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 그 사람이 리더다.
● 리더십은 일을 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책임을 떠안는 용기에서 증명된다.